“사장님, 비행기 처음 타보는 사람처럼 왜 그렇게 창밖만 봅니까? 잠이나 좀 주무세요.”
아내의 핀잔에 멋쩍게 웃었습니다. 쉰 넘어 떠나는 첫 가족 해외여행, 그것도 사업 실패의 쓴맛을 보고 겨우 다시 일어서는 중에 떠나는 필리핀 세부행 비행기 안에서 저는 정말이지 촌놈처럼 들떠 있었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검푸른 바다 위 하얀 뭉게구름이 꼭 제 마음 같았습니다.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그런 묘한 그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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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마젤란의 십자가 앞에서 깨달은 ‘실패’의 재해석
세부 시티의 첫인상은 ‘혼돈 속 질서’였습니다. 낡은 건물과 최신 쇼핑몰, 매캐한 매연과 향긋한 꽃향기가 뒤섞인 거리는 꼭 제 인생의 축소판 같았습니다. ‘망했다’ 싶다가도 어느새 다시 꾸역꾸역 살아가는 제 모습과 닮았달까요.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마젤란의 십자가였습니다. 1521년, 마젤란이 필리핀 최초의 기독교인을 세례하며 꽂았다는 바로 그 십자가. 팔각정 안 천장에는 당시의 상황을 그린 장엄한 벽화가 그려져 있었습니다. 가이드는 본래의 십자가는 사람들이 하도 떼어가서 나무 상자 안에 보호하고 있다고 설명해 주더군요. ‘기적을 바라는 마음’에 십자가 조각을 떼어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사업 실패 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제 심정과 겹쳐져 묘한 공감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아빠, 마젤란은 여기서 라푸라푸한테 죽었다면서요? 그럼 실패한 거 아니에요?”
대학생 딸의 날카로운 질문에 가슴이 철렁했습니다. 맞습니다. 위대한 항해사 마젤란은 결국 이곳 막탄 섬에서 원주민 추장 라푸라푸에게 패배하고 목숨을 잃었죠. 그의 세계 일주 꿈은 ‘실패’로 끝난 셈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그의 도전은 실패로만 기록되어야 할까?’ 그의 ‘실패’는 아이러니하게도 필리핀이라는 나라에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의 꺾인 꿈이 이곳 사람들에게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점이 된 것입니다. 순간, 제 가슴을 짓누르던 ‘실패’라는 단어의 무게가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나의 실패가 꼭 인생의 끝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어쩌면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점일지도 모른다는 위로를 그 낡은 십자가 앞에서 얻었습니다.
2. 호핑투어와 산미구엘, 그리고 잊고 있던 ‘가장’의 무게
이튿날, 저희 가족은 전형적인 한국인 관광객처럼 호핑투어를 나섰습니다. 에메랄드빛 바다로 풍덩 뛰어들어 형형색색의 열대어를 마주한 순간, 복잡했던 머릿속이 거짓말처럼 깨끗해졌습니다. 수영을 못 하는 아내는 구명조끼에 의지한 채 제 손을 꼭 잡았고, 다 컸다 생각했던 아들 녀석은 어린아이처럼 물장구를 치며 즐거워했습니다.
배 위에서 맛본 즉석 라면과 달콤한 망고, 그리고 시원한 산미구엘 맥주 한 병. 세상에 부러울 것이 없는 순간이었습니다. 갓 잡은 성게를 즉석에서 손질해 주던 현지 소년의 까만 눈동자를 보며 생각했습니다. 행복이라는 것이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니었구나.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맛있는 음식을 나누고, 눈부신 햇살을 즐기는 이 순간이야말로 진짜 행복이구나.
그동안 저는 ‘가장’이라는 무거운 이름 아래 너무 많은 것을 짊어지려 애썼던 것 같습니다. 더 큰 집, 더 좋은 차, 더 많은 돈. 그런 것들이 가족의 행복을 보장해 줄 거라 믿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제 욕심이 가족들의 웃음소리를, 함께하는 시간의 소중함을 잊게 만들었던 것은 아닐까요. 시원한 맥주 한 모금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며, 그동안 저를 짓누르던 책임감의 무게가 비로소 건강한 ‘사랑’의 무게로 느껴지기 시작했습니다.
3. 인생 라떼 한 잔: 다시, 길을 나설 용기
짧은 세부 여행은 제게 ‘인생 라떼’ 한 잔과도 같은 시간이었습니다. 실패의 쓴맛을 부드러운 위로로 감싸주고, 다시 앞으로 나아갈 달콤한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으니까요.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저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습니다. 올 때와 같은 풍경이었지만, 더 이상 불안과 설렘이 뒤섞인 혼란스러운 그림으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뭉게구름 사이로 쏟아지는 햇살이 마치 제 미래를 축복해 주는 듯했습니다.
혹시 지금, 인생의 쓴맛에 좌절하고 계신 분이 있습니까? 그렇다면 잠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시길 권합니다. 어쩌면 가장 큰 위로와 행복은 아주 가까운 곳에, 당연하게만 여겼던 소중한 사람들의 미소 속에 있을지 모릅니다. 세부의 망고보다 더 달콤한 인생의 진리를, 저는 쉰이 넘어 떠난 가족여행에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인생 라떼’ 같은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댓글로 여러분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걸이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