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저와 비슷한 시대를 살아온 아버지들에게 '좋은 아빠'란 어떤 의미였을까요. 아마 열에 아홉은 '돈 잘 벌어다 주는 사람'이라고 답할 겁니다. 저 역시 그랬습니다. 자식 입에 맛있는 거 하나 더 넣어주고, 남들 하는 건 다 해주려면, 뒤돌아볼 틈 없이 앞만 보고 달려야 했습니다. 아이의 학예회 날에는 더 큰 계약이 있었고, 생일날에는 중요한 접대가 있었습니다. 아들 녀석의 앨범에는 엄마와 찍은 사진은 빼곡하지만, 아빠인 저는 마치 유령처럼 드문드문 등장합니다. 그렇게 가장의 책무라는 갑옷을 입고 정신없이 살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제 손을 잡지 않으면 한 발짝도 못 떼던 녀석이 어느덧 제 키를 훌쩍 넘어 어엿한 청년이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녀석이 취직하고 첫 월급을 탔다며 저녁을 사겠다고 나섰습니다. 늘 제가 사주던 삼겹살을 자기가 사겠다니, 기특하면서도 어색한 마음에 헛기침만 연신 해댔습니다. 동네 허름한 고깃집, 마주 앉아 불판 위에서 고기가 지글지글 익어가는 풍경은 예전과 똑같았지만, 그날의 공기는 분명 무언가 달랐습니다. 어색한 침묵을 깨려 "일은 할 만하냐?", "상사는 잘해주고?" 같은 뻔한 질문들을 던졌지만, 대화는 자꾸만 툭툭 끊겼습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가장 가깝지만, 어쩌면 가장 서먹한 부자 사이였으니까요.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술잔
한참이나 머뭇거리던 녀석이, 이내 결심한 듯 서툰 손길로 소주병을 집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맞은편에 앉은 아내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번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녀석의 손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이 제 눈에도 보였습니다. 아마 첫 출근보다, 첫 프레젠테이션보다 더 떨렸을 겁니다. 아버지라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상사 앞에서, '어른'의 첫 관문을 통과하는 시험대 같았을 테니까요. 찰랑, 하고 잔이 채워지는 그 짧은 순간, 제 머릿속에서는 수십 년의 세월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습니다.
아이가 열이 펄펄 끓던 어느 겨울밤, 녀석을 등에 업고 눈길을 헤치며 병원으로 내달리던 제 젊은 날이 떠올랐습니다. "아빠, 추워..." 하고 웅얼거리던 작은 목소리, 제 등 위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던 그 작고 뜨거웠던 생명의 무게. 세상 모든 것을 잃더라도 이 아이만은 지켜야겠다고 다짐했던 그 밤의 절박함이 심장 위로 다시 차오르는 듯했습니다. 그랬던 녀석이, 이제는 제 앞에 앉아 제 잔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제가 아들에게 세상을 가르쳤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녀석은 세상의 술을 제게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 든 술잔이, 그날따라 천근만근처럼 무겁게 느껴졌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술 한 잔의 무게가 아니었습니다. 한 아이를 어른으로 키워낸 아버지로서의 세월, 팍팍한 세상 속에서 가장의 자리를 지켜내야 했던 책임감, 그리고 이제는 내 어깨의 짐을 조금은 나누어지려는 아들의 대견함이 모두 그 작은 잔 안에 담겨 있었습니다.
쑥스러운 마음에 "이놈, 술 따르는 솜씨가 제법인데?"라며 퉁명스럽게 내뱉고는 단숨에 잔을 비웠습니다. 그 한 잔의 술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순간, 수십 년간 부자 사이에 존재했던 보이지 않는 벽이 함께 녹아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어색했던 공기는 온데간데없고, 우리는 그제야 비로소 진짜 어른 대 어른으로, 남자 대 남자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습니다. 녀석이 털어놓는 사회생활의 고충과 미래에 대한 고민 속에서, 저는 더 이상 철부지 아들이 아닌, 세상과 씨름하는 한 명의 동지를 보았습니다.
아버지로서 받은 최고의 상장
사업을 할 때, 저는 수없이 많은 술잔을 받았습니다. 최고급 호텔에서 마시던 수백만 원짜리 와인, 계약을 성사시키기 위해 억지로 웃으며 부딪히던 폭탄주들. 하지만 그 잔들은 모두 '거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공허한 웃음과 계산적인 말들이 오가는 자리에서 술은 그저 관계의 윤활유이자 목적을 위한 수단일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들이 따라준 이 소주 한 잔에는 그 어떤 계산도, 목적도 없었습니다. 서툴지만 진심이 담겨있었고, 화려하진 않지만 온기가 있었습니다. 단언컨대, 제 인생 최고의 술 한 잔은 바로 그날, 아들이 처음으로 따라준 소주 한 잔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 그 어떤 성공보다도 값진, 아버지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상장이었습니다.
- 걸이형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