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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로 만든 음료, 단골손님은 ‘사장님 시그니처’라 부릅니다

by 걸이형 2025. 8.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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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 시그니쳐 커피

 

 

 

제 인생에서 ‘실수’와 ‘실패’는 지긋지긋한 동의어였습니다. 크게 넘어져 본 사람은 작은 돌부리에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법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가게를 운영하며 늘 완벽한 레시피, 정해진 절차를 강박적으로 지키려 애썼습니다. 실수는 곧 손실이고, 손실은 실패의 다른 이름이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 단단했던 믿음에 기분 좋은 균열이 생긴 것은,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평일 오후였습니다.

 

그날따라 저는 유독 예민했습니다. 아침부터 원두 납품 업체와 문제가 생겨 한바탕 언성을 높였고, 오후에는 밀려드는 주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한 단골손님이 늘 마시던 달콤한 ‘바닐라 크림 라떼’를 주문했을 때도, 저는 여러 주문을 한꺼번에 처리하느라 머릿속이 온통 뒤죽박죽이었습니다. 우유 거품을 내고, 샷을 내리고, 시럽을 펌핑하는 과정이 기계처럼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잔에 시럽을 넣는 순간, 뭔가 잘못됐음을 직감했습니다. 바닐라 시럽 특유의 부드러운 향 대신, 어딘가 낯설고 고소한 향이 코끝을 스쳤습니다.

 

아차, 바닐라 시럽 대신 새로 들여놓은 ‘헤이즐넛 시럽’을 넣은 것이었습니다. 머릿속이 하얘졌습니다.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다시 만들어야겠다.’ 이 생각뿐이었습니다. 손실 처리 딱지를 붙여 개수대 한쪽에 치워두려던 찰나, 주문했던 단골손님, 늘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하던 대학생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사장님, 혹시 그거 버리실 거면 제가 한번 마셔봐도 될까요?”

 

저는 손사래를 치며 “아닙니다, 레시피가 완전히 잘못 들어가서 이상한 맛이 날 겁니다. 바로 다시 만들어 드릴게요.”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웃으며 괜찮다고, 오히려 새로운 맛이 궁금하다고 저를 설득했습니다. 마지못해 저는 잔을 건네며 “정말 이상하면 바로 말씀해주세요.”라고 몇 번이나 다짐을 받았습니다.

 

“인생 최고의 레시피는 종종 실수의 부엌에서 탄생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맛봐 줄 사람의 용기다.”
- 50대 자영업자 걸이형의 ‘인생 라떼’ 한 모금 -

 

그분은 조심스럽게 음료를 한 모금 마시더니, 잠시 눈을 동그랗게 떴습니다. 저는 심판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잔뜩 긴장하고 있었습니다. 곧이어 그분은 환하게 웃으며 말했습니다. “사장님, 이거 뭐예요? 바닐라의 달콤함에 고소함이 더해져서 훨씬 깊은 맛이 나요. 꼭 숨겨진 메뉴 같아요!” 저는 어안이 벙벙해서 그저 “실수로… 시럽을 잘못 넣어서…”라고 우물쭈물 대답할 뿐이었습니다.

 

그날 이후, 그 손님은 가게에 올 때마다 메뉴판에도 없는 그 음료를 주문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장님, 저번에 마셨던 그 ‘실수 음료’ 한 잔 주세요.”라고 말입니다. 다른 손님들이 그게 뭐냐고 물을 때면, 그분은 어깨를 으쓱하며 “이 집 사장님 시그니처 메뉴예요. 아무한테나 안 파는 거예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습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손님들도 호기심에 ‘사장님 시그니처’를 주문하기 시작했고, 얼떨결에 제 실수는 가게의 특별한 비밀 메뉴가 되었습니다.

이제 저는 ‘실수’라는 단어를 예전처럼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계획대로 되지 않는 순간이 오히려 새로운 길을 열어주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저의 작은 가게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실패는 그저 결과이지만, 실수는 얼마든지 과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요. 제 ‘실수’에 기꺼이 기회를 주고 ‘시그니처’라는 멋진 이름을 붙여준 그 손님의 따뜻한 마음이, 어쩌면 제 인생 라떼의 가장 중요한 레시피였을지도 모릅니다.

 

사장님들의 가게에도 혹시 ‘실수’로 탄생한 보석 같은 메뉴가 있지는 않으신지요. 계획에 없던 일이 가져다준 기분 좋은 선물이 있었다면, 그 이야기도 궁금해집니다.

 

- 인생 라떼를 내리는, 걸이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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