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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공항의 밤, 주머니 속 나무거북이가 내게 가르쳐준 것들

by 걸이형 2025.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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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으로 공항출발

 

안녕하십니까, ‘걸이형’입니다.

 

여행의 끝, 공항의 밤

2025년의 어느날 세부 막탄 국제공항의 밤은 유난히 소란스러웠습니다. 며칠간 우리 가족을 감싸주던 달콤하고 나른한 공기는 간데없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과 이별을 재촉하는 안내 방송만이 귓가를 맴돌았습니다. 손에 쥔 한국행 비행기 표는 마치 치열한 현실로 돌아오라는 ‘소환장’처럼 느껴졌습니다.

아내는 애써 웃으며 “그래도 집에 가는 게 좋긴 하다”고 말했지만, 눈가엔 아쉬움이 역력했습니다. 아이들은 남은 페소를 털어 마지막 기념품을 사느라 분주했죠. 그 북적임 속에서 문득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자, 딱딱한 것이 만져졌습니다. 호핑투어 선착장에서 끈질긴 상인을 이기지 못해 샀던 조악한 모양의 나무거북이었습니다. 아내는 “저런 걸 뭐 하러 사”라며 핀잔을 줬지만, 땀 흘리는 상인의 눈빛을 외면하지 못해 쥐여준 돈 몇 푼의 결과물이었죠.

그때는 분명, 세부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그 거북이가 꽤 근사해 보였습니다. 하지만 공항의 차갑고 하얀 형광등 아래서 본 그것은, 누가 봐도 조잡한 나무 조각일 뿐이었습니다. 순간 깨달았습니다. 여행의 마법이란 이런 것이라고. 현실이라는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는 시시해 보이는 것들도, 여행이라는 태양 아래서는 특별한 의미로 반짝인다는 것을. 저는 그 나무거북이를 가방 깊숙한 곳에 넣었습니다. 비록 마법은 풀렸지만, 그 마법 같았던 순간의 증표는 오롯이 제 몫이니까요.

* * *

세부의 열기를 짐칸에 싣고

수하물 벨트 위로 우리 가족의 짐가방이 하나둘씩 사라졌습니다. 그 안에는 아이들의 물안경, 아내가 고른 화려한 빛깔의 원피스, 그리고 제 낡은 슬리퍼가 뒤섞여 있겠지요. 단순히 물건을 부치는 행위가 아니었습니다. 지난 며칠간의 행복했던 시간을 통째로 포장해 어두운 짐칸으로 밀어 넣는 의식과도 같았습니다. 이제 저 기억들은 한국의 팍팍한 아파트 창고 어딘가에서 다음을 기약하며 긴 잠을 자게 될 겁니다.

하지만 괜찮습니다. 모든 걸 두고 가는 것은 아니니까요. 제 마음 한구석에는 분명 세부의 뜨거운 태양 한 조각을 품었습니다. 다시금 가게 문을 열고, 수많은 ‘사장님’ 소리를 들으며 버텨내야 할 내일의 에너지를 충전한 셈입니다. 이 여행은 낭비가 아니라, 다음 현실을 버텨내기 위한 가장 절실한 ‘투자’였음을 저는 압니다.

* * *

이륙, 꿈과 현실의 경계에서

비행기가 활주로를 박차고 육중한 몸을 일으키는 순간, 강한 압력이 온몸을 짓눌렀습니다. 마치 ‘이제 그만 꿈에서 깨어나!’라고 현실이 제 등을 떠미는 듯한 강력한 힘이었습니다. 창밖으로 세부의 불빛들이 보석처럼 흩어지다 이내 한 점으로 작아졌습니다. 안녕, 나의 달콤했던 비상구여.

칠흑 같은 어둠 속을 나는 몇 시간의 비행은 꿈과 현실의 경계 그 자체였습니다. 잠든 아내와 아이들의 고른 숨소리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가장’이라는 이름으로 비행기를 모는 조종사의 삶과 제 삶이 다르지 않다고. 때로는 거친 난기류에 흔들리고, 때로는 가야 할 길을 잃고 방황하지만, 결국에는 가족이라는 승객들을 안전하게 ‘일상’이라는 목적지까지 데려다 놓아야 하는 임무. 그것이 제게 주어진 항로입니다.

* * *

다시, 나의 대한민국으로

“우리 비행기는 곧 인천 국제공항에 착륙할 예정입니다.” 익숙한 한국어 안내 방송이 잠을 깨웠습니다.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한 도시의 불빛들. 세부의 그것과는 다른, 치열하고 질서정연한 불빛이었습니다. 돌아온 것입니다. 나의 일터이자, 나의 전쟁터이자, 나의 모든 것이 있는 곳으로.

비행기에서 내리는 사람들의 표정에는 여행의 고단함과 일상 복귀의 막막함이 뒤섞여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마음이 단단해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나를 기다리는 현실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위안인지 새삼 깨닫습니다. 세부의 태양을 마음에 품었으니, 한국의 겨울바람도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겁니다. 그렇게 저는 다시, ‘걸이형’의 삶으로 착륙했습니다.

 

당신의 비행기는 지금, 꿈을 향해 이륙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현실을 향해 착륙하고 있습니까?

 

걸이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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