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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의 밤, 아내의 한마디가 스테이크보다 따뜻했던 우리 가족의 저녁

by 걸이형 2025. 8.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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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걸이형’입니다.

 

세부의 열기, 그리고 가장의 무게

몇 년 만에 겨우 시간을 낸 가족 여행이었습니다. 오토바이 경적과 매연이 뒤섞인 세부의 복잡한 거리를 지나며, 아내의 얼굴엔 고단함과 설렘이 교차했고, 어느새 훌쩍 커버린 아이들은 스마트폰에서 눈을 떼지 못했죠. 그런 가족들을 이끌고 아카시아 스테이크하우스로 향하는 제 발걸음에는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이 묵직하게 실려 있었습니다. ‘모처럼의 외식인데, 모두가 만족해야 할 텐데.’ 실패에 익숙한 제게는 맛있는 저녁 한 끼조차 조심스러운 도전과 같았습니다.

삐걱이는 나무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바깥의 혼돈은 거짓말처럼 사라졌습니다. 시원한 공기와 감미로운 음악이 우리 가족을 감쌌습니다. 아내는 “어머, 분위기 있네”라며 작게 속삭였고, 아이들도 두리번거리며 잠시 스마트폰을 내려놓더군요. 언제부턴가 이렇게 다 함께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한 기억이 까마득했습니다. 그저 하루하루 버텨내기 바빴으니까요. 그 작은 변화만으로도 제 어깨의 짐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습니다.

* * *

가족이라는 이름의 식탁

메뉴판을 펼치자 가격표부터 눈에 들어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가장의 숙명일까요. 아들은 눈을 빛내며 “아빠, 저 립아이 스테이크 먹어도 돼요?”라고 물었고, 아내는 제 눈치를 살폈습니다. 그 짧은 순간, 수많은 계산이 머리를 스쳐 갔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습니다. 이런 날 쓰려고 그동안 허리띠를 졸라맨 것 아니겠습니까. “그럼, 오늘은 아빠가 쏜다!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호기로운 제 말에 아이들은 환호성을 질렀고, 아내의 입가에도 비로소 편안한 미소가 번졌습니다. 정작 저는 가장 무난하고 익숙한 ‘블랙 페퍼 스테이크’를 주문했고요.

잠시 후, 식탁 위로 각자의 스테이크가 푸짐하게 차려졌습니다. 아이들 앞에는 화려한 소스를 얹은 최신 유행의 스테이크가, 제 앞에는 투박한 통후추가 전부인 스테이크가 놓였습니다. 마치 신세대인 아이들의 인생과, 구세대인 제 인생을 보여주는 것 같아 쓴웃음이 났습니다.

* * *

아내의 한마디, 최고의 위로

나이프로 제 스테이크를 썰어 아내의 앞접시에 먼저 한 점 놓아주었습니다. 수십 년간 제 곁에서 쓴맛 단맛 다 보며 함께 굳은살이 박인 아내입니다. 아내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스테이크를 입에 넣고는, 잠시 후 저를 보며 희미하게 웃었습니다. “당신 인생 같아요. 겉은 단단하고 투박해 보여도, 씹을수록 진국이야.”

그 한마디에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기분이었습니다. 가게가 엎어지고 밤새 잠 못 이루던 밤들, 남들 앞에 고개 숙여야 했던 수많은 날들. 그 시간들이 만들어낸 제 삶의 거친 겉면을, 아내는 그 누구보다 정확히 꿰뚫어 보고 있었습니다. 목이 메어와 잠시 물을 마셨습니다. 고개를 들어 아내를 바라보자, 그 눈빛 속에는 ‘그동안 고생 많았노라’는 무언의 위로가 담겨 있었습니다.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아이들은 “아빠 것도 맛있네?”라며 제 스테이크를 한 점씩 가져가 맛을 보더군요. 늘 무뚝뚝하고 재미없는 아빠라고 생각했을 텐데, 오늘 저녁 식탁에서만큼은 제 인생의 맛을 조금이나마 이해해 주는 듯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스테이크를 나누어 먹으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이어갔습니다. 각기 다른 굽기와 소스로 익어가는 스테이크처럼, 우리 가족 각자의 인생도 다르지만 결국 ‘우리’라는 하나의 식탁 위에서 어우러져 맛을 내고 있었습니다.

* * *

우리 인생의 완벽한 굽기

오늘 저는 이곳에서 단순히 스테이크를 먹은 것이 아닙니다. 제 인생 최고의 파트너로부터 가장 따뜻한 위로를 받았고, 가족이라는 이름의 완벽한 ‘코스 요리’를 맛보았습니다. 화려하진 않지만 씹을수록 깊은 맛이 나는 내 스테이크와, 그런 나를 알아주는 아내, 그리고 우리의 역사를 맛보는 아이들. 이만하면 꽤 성공한 ‘미디엄 레어’ 인생이 아닐까, 하는 벅찬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세부의 밤은 깊어지고, 우리 가족의 웃음소리는 레스토랑 안을 가득 채웠습니다. 세상 모든 가장의 스테이크는 아마 ‘미디엄 레어’일 겁니다. 그리고 그 맛을 알아주는 가족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세상에서 가장 완벽한 굽기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의 식탁 위에는, 인생의 맛을 알아주는 누가 함께하고 있습니까?

 

걸이형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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